아편전쟁, 청일전쟁, 패전후 찾아온 손문의 신해혁명(청나라)
아편전쟁에 패전한데 이어 일본과 싸운 청일전쟁에서도 패한 청나라는 더욱 강한 여러 나라의 압력을 받게 된다. 이후 중국에는 외국인을 미워하는 마음이 깊어졌고, 외국인과 싸워야 한다는 분위기가 높아졌다. 이 때 중국인들 사이에 널리 퍼진 것이 예부터 전해져 오던 의화 권법이었다. 이 무술은 백일 동안 연마하면 총알이 피해가고 사백일을 연마하면 하늘을 날 수 있다는 말이 전해졌다.
어떤 일이든지 터지기만 바라던 사람들 사이에 이 무술은 빠르게 퍼져 갔고, 중국 북부에 살던 외국인은 그들에게 살해 당하거나 재산을 빼앗기기도 했다. 청나라 조정에서는 이런 의화단 운동을 지지하는 보수파와 반대하는 혁신파가 서로 맞서게 되어 보수 세력이 권력을 잡고 의화단과 함께 외국에 선전 포고를 하게 된다. 한편, 손문은 청일 전쟁이 끝난 직후인 1895년 11월, 광주에서 혁명의 깃발을 들었는데, 만주족인 청왕조를 물리치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제1회 혁명은 실패로 돌아가고 현상금이 걸린 손문은 ㅅ더둘러 일본으로 망명하게 된다.
일본에 온 손문은 1905년 7월, 일본에 있는 여러 혁명 단체를 단결하게 하여 중국 혁명 동맹회를 만들고 민보를 발행하여 삼민주의(민족주의, 민권주의, 민생주의)의 강령을 실었다. 이리하여 손문은 혁명 여론을 불러일으키고 각지의 혁명 조직에 함께 뭉칠 것을 지시하였는데, 1911년 10월 10일, 유럽의 강한 나라들에게 꼼짝하지 못하는 청왕조에 대해 싫증을 느낀 혁명파 군인들은 마침내 호북성의 성도인 무창에서 들고 일어나고, 그리고 한 달이 못되어 12개 성이 독립정권을 세움으로써 청나라 왕조는 무너지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신해혁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