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혁명 직후의 적벽내전, 그리고 미일관계와 태평양전쟁 발발
러시아혁명 이후의 러시아에서의 내전은 향후 세계정세에 미친 영향도 컸고 이 내전양상도 무척 복잡하게 진행되었지만
학교 교과서에는 상세한 서술이 안 되어 있을 겁니다.
영화 닥터 지바고에서 라라의 연인이었던 빠샤가 적군의 지역사령관으로 변신해서 우연히 지바고와 만나는 장면이 있죠.
그리고 영화에서 후반부 쪽은 혁명 이후의 내전상황이 배경이고 더 복잡하게 전개됩니다.
내전이라고 하지만 사실상의 국제전이었습니다.
적백내전은 상세한 서술을 하려면 상당히 긴데 간단하게 한 편으로 정리했습니다.
일본은 이 적백내전에도 뭐 먹을 거 없나 하고 많은 병력을 파병했습니다.
1917년 10월 혁명 이후 대부분의 군대는 볼세비키의 휘하에 들어갔지만, 군대에 남아있기보다는 집에 간 병사가 훨씬 많았다.
레닌이 이끄는 볼세비키는 러시아의 중심 도시들만 장악했을 뿐이었고, 지방과 농촌지대에는 로마노프 왕조를 복권시키려는
왕당파 군벌과 볼세비키에 반대하는 정치세력들도 상당했다.때문에 볼세비키 정권이 러시아 전역을 통제하려고 하자,
반볼세비키 진영과의 대립이 격화되면서 내전이 발발한다.
볼세비키 정부군(공산당)은 붉은 색을 상징으로 썼으므로 적군(Red Army), 반군은 흰 색을 상징으로 써서
백군(White Army)이라 불렀다. 볼세비키 혁명에 실망한 남 우크라이나에 활동하는 무정부주의 무장단체를 흑군,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봉기를 녹군,생태주의 정치세력 반 혁명봉기군이자 녹군의 한 분파들을 청군
여기에 폴란드, 코사크, 각 지역의 부농들의 사병이나 타타르인과 중앙아시아 지역의 이슬람 등 종교적 봉기세력과 발트,
캅카스 지역의 민족주의 세력 봉기까지 겹치면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조직들이 적군에 대항했다.
또 1차대전이 끝나기 이전에는 독일군이 계속 이들을 간접적으로 지원했고, 레닌은 한숨 돌리기 위해
굴욕적인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트로츠키 등의 반대 속에도 강행했다.
게다가 연합국 역시 종전을 전후하여 볼세비키 정권을 무너뜨리고, 다시 독일군과 계속 싸우는 정권을 세울 목적으로
반볼세비키 세력을 지원하면서 전쟁은 복잡한 양상을 띄게 된다.
적백내전 초기에는 중앙 라다를 중심으로 우크라이나가 독립을 선언하면서 적군에 반기를 들었고 돈 쿠반 지역의 코사크도 반기를 들어 러시아 제국의 편에 섰다. 또 오스트리아-헝가리에 맞서 싸웠던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을 적군이 강제로 무장 해제시키려고 들었다가 오히려 역으로 자극시켜 그들이 시베리아 철도를 타고 모스크바로 진격하는 등의 불리한 전황이 계속되었다.
게다가 협상국(간섭군)은 러시아에 지원했던 장비와 물자, 그리고 협상국 내에 남아있던 러시아 지원용 물자를 백군에게 넘겼다.
이를 통해 백군은 오히려 적군보다 우월한 장비를 보유하게 되어 전투효율이 크게 향상되었으며, 콜챠크의 시베리아 백군은
차차 서쪽으로 점차 모스크바를 향해 오고 있었다.
전황이 워낙 다급한 나머지 적군은 백군이 차르를 되찾고 자신들을 역적으로 선포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으며,
그 결과 1918년 7월엔 니콜라이 2세 일가를 전원 처형하는 사태까지 발생하였다.
백군은 전차와 항공기를 장비하는 등 적군보다 장비도 좋은 편이었고,
각 부대의 훈련 및 부대 내부의 상하명령체계도 잘 잡힌 편이었다.
허나, 적군이 가장 몰렸을 때도 모스크바 등지의 주요 도시와 거점은 적군이 확실하게 장악하고 있었으며,
각 거점도 확실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이 점은 사방에서 몰려들고는 있지만 각지에 분산돼서 통일된 명령체제가 없는
백군보다 확실하게 유리한 상황이었다.
이에 더해 레프 트로츠키가 1918년 6월에 강제 징병을 실시하였다. 그 이전까지 적군의 주축은 혁명의 지지기반이었던
도시 노동자였으나, 이후로는 빈농에 대해서도 강제 징병제를 도입하였다. 징병제에 대한 농민의 반대는 즉결처분으로서 억눌렀다.
이 과정에서 많은 무리수가 발생했지만 최종적으로는 5백만에 육박하는 병력을 편성, 물량 공세를 펼칠 수 있었다.
그리고 고질적인 지휘관 부족 및 군사적 능력 보충을 위해 과거를 묻지 않고 구제국 장교들을 대거 영입했다
(이들 중 볼세비키의 이념에 공감해서 지원한 사람은 극소수였고 많은 수는 기회주의자거나 잠재적 반역자였다.
실제로 내전 시기에 구 제정 장교들에 의한 적군에의 반란 내지 사보타주 행위는 결코 적지 않았고, 이런 반란을 억제하기 위해 정치장교의 배치는 필수적인 사항이었다.)
전투력이 개선되자 전황은 공산군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반해 백군측은 적군에게 대항한다는 것만 빼면 머리부터 발 끝까지 다른 집단의 합이었으며,
심지어 서로 싸우기도 하는 등 통일된 행동을 할 수 없었다.
원래 백군의 각 부대는 장비도 좋고 부대 내부의 상하명령체제도 확실했지만 각 부대를 통합지휘할 최고사령관이 없다는 것은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게다가 백군은 주로 러시아의 주변부를 장악했기 때문에 장악한 면적에 비해 인구가 적었으므로 최전성기에도
25만 이상의 병력을 동시에 운용해본 일이 없다. 이래서야 장비가 좋아도 이기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설상가상으로 백군 부대가 패하면 가지고 있던 좋은 물자와 장비를 적군에게 내주게 되니
안 그래도 강한 적군이 더 강해지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백군을 물리치는 과정에서 적군은 기왕에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도 깨졌으니 우크라이나, 폴란드, 핀란드,
그리고 발트 3국 같이 러시아에서 독립을 시도했던 국가들을 흡수하고 더 나아가서는 독일 등지까지 팽창하려는 야심을 보였고,
이는 조약 체결 때부터 레닌의 계획대로 정해진 것이었다.
하지만 발트해 국가들은 연합군(소비에트에게 있어서는 간섭군)과 함께 적군을 몰아내고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에서 폴란드군이 기적적인 반전에 성공하는 등 도처에서 대패하여 실패로 돌아갔고,
결국 동부 우크라이나 이외에는 영국이 찝쩍거렸던 코카서스 지역만을 다시 점령할 수 있었다.
이렇게 적군이 패배한 이유는 백군측과는 달리 발트3국이나 폴란드 등은 이미 자체 정부가 수립되었고,
일치단결해서 저항했기 때문에 아직 훈련도나 장비가 그렇게 좋지 않은 적군이 이기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연합군 입장에서 보자면 1차 대전에서 다 함께 연합해서 싸우던 와중에 난데없이 혼자 제멋대로 독일하고 화해하더니
조약까지 맺고 전선 이탈해놓고, 이제와서 조약이 잘못 됐다면서 도로 물리려 드는 소련이 밉상일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미국과 영국이 해군을 파견하거나 일본이 데라우치 마사타케 총리에 의해 7만명을 동원하여 시베리아를 공격하는 등
대규모의 병력을 투입하여 러시아의 주요 항구들을 점령하였으나 기나긴 전쟁을 이미 치른 터에 새로운 전쟁을 하기엔
어려운 처지였던데다 간섭군 내부에서도 불협화음이 터져나왔다.
미국의 경우 일본이 러일전쟁을 정산할 요량으로 원래 주둔해야 할 블라디보스토크를 벗어나 북진하자 크게 반발,
무력 충돌 직전까지 갔다.여하간 1920년까지 백군의 조직적 저항은 완전히 분쇄되었고,
이에 명분을 잃은 간섭군은 동시베리아의 일본을 제외하고는 모조리 철수하고 만다.
1921년에 외몽골에 잔존해 있던 운게른 슈테른베르크까지 공산군에게 분쇄되었고, 마지막 외부 간섭군이자
블라디보스토크에 장기주둔할 속셈이었던 일본군도 철수했으며, 1924년에는 사할린 북부에서도 철수하면서
러시아의 영토는 소비에트 정권이 완전히 장악하게 된다.
이 때 몽골(외몽골)이 정식으로 중국으로부터 독립하면서 두 번째 공산국가가 되었다.
이 전쟁과 제1차 세계대전에서의 전훈은 소련식 기동전에 대한 교리가 정립되는 배경이 되었다.
또한 이 때 러시아 내외의 반볼세비키 세력을 제거하면서 얻은 경험으로 첩보 능력이 발달해
냉전 때의 소련의 악명높은 첩보전 능력에 일조하기도 했다.
소비에트 내의 합의적·민주적 분위기가 약화되고, 일사불란한 군대식 관료체제가 대세가 된 것도 이 시기로 여겨진다.
그래서 연구자에 따라 적백내전이 볼세비키의 성격을 바꾸었고, 이것이 소련의 관료독재화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여기기도 한다.
그리고 이 시기에 반볼세비키 세력들이었던 러시아 귀족들과 기존의 지주층, 러시아 정교 사제들이 해외(주로 유럽)로 쫓겨났다.
이들은 당연히 극도의 반소·반공 정서를 가지고 있었고 유럽의 반공정서 형성에 기여했다.
소련은 이때 외국의 침공을 받은 경험이 충격으로 남아 두고두고 자본주의 국가들의 침공을 두려워하는 트라우마가 되었다.
특히 스탈린은 이에 대비하기 위해 광적으로 공업화에 집착하였다.
또한 사회주의 혁명의 확산 실패와 적백내전의 위기는 트로츠키의 사회주의 혁명 확산론을 좌절시키고,
자국 공업화 및 생존을 주장한 스탈린의 주장을 강화시키기도 했다.
그리고 이게 급속한 공업화와 농업 집단화를 불러들였다.
일본은 이 전쟁을 계기로 연해주 일대와 중국 일대에서 자기들의 세력을 넓혀가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그때까지 일본의 뒤를 봐주던 미국의 반감을 사게 되어 1930년대 미일의 관계는 전쟁만 없을 뿐이지
서로를 가상 적국으로 상정하게 되었고 결국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