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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세계사

걸프전쟁의 원인과 이라크 사담 후세인, 그리고 팔레스타인의 문제

by show쇼 2018. 8. 30.

걸프전쟁의 원인과 이라크 사담 후세인, 그리고 팔레스타인의 문제


사진 출처 : 위키백과. 사막 폭풍 작전에서 1991년 2월 24일 ~28일 동안의 지상군의 진격 방향



1990년에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략한 것을 계기로 1991년 이라크와 다국적군과의 사이에 걸프전쟁이 일어나자,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 1957년 바트당에 입당. 1959년 카셈 타도 쿠테타에 실패하고 이집트로 망명한다. 1963년 귀국해 1968년에 바트당이 쿠데타로 정권을 획득하자 바크르 대통령에 이어 1979년에 대통령이 된다. 재임 중에 이란-이라크전쟁과 걸프전쟁이 있었다. 2003년 미국을 주축으로 하는 이라크전쟁으로 정권이 붕괴되고 체포되었다 ) 대통령은 중동 문제와 자국의 문제를 연결시켜 이라크의 행동을 정당화 했습니다.

즉. 이라크가 쿠웨이트에서 나가야 한다면 이스라엘도 팔레스타인에서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미사일 공격을 받았지만 미국의 요청으로 이라크에 대한 보복을 참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때 아라파트는 후세인의 쿠웨이트 침공을 지지해 아랍 세계에서 고립되고 자금 원조마저 못 받게 됩니다.

이렇게 되자 PLO는 이스라엘과 더 이상 강경한 자세로 대결할 힘이 없어진 것이죠,,




한편, 미국은 중동의 문제를 그냥 두었다가는 자신들의 국익에 반하는 정권이 국제 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는 것을 우려하여 조기 해결을 결심하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1993년에 PLO의 아라파트 의장과 이스라엘의 라빈 수상이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의 중개로 워싱턴에서 팔레스타인 잠정자치협정에 사인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 일을 두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양쪽에서 모두 반발이 발생하는데,,

이듬해 라빈은 유대교 과격파 청년에게 암살을 당합니다.




이후 이스라엘에서는 우파인 리쿠드당이 정권을 잡으면 중동 평화가 후퇴했고, 좌파인 노동당이 정권을 잡으면 중동 평화가 다시 전진하는 불안정한 상태가 이어지게 됩니다.

또한 PLO 산하에 들어오지 않은 새로운 팔레스타인 조직인 하마스가 이스라엘에 대한 테러를 계속하면서 팔레스타인의 평화는 아직도 그 끝이 보이지 않는 상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