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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한국사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 체결 배경, 그리고 이토히로부미와 안중근의사

by show쇼 2018. 8. 31.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 체결 배경, 그리고 이토히로부미와 안중근의사




1900년 중국에서 의화단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이때 8개국 공동 출병의 중심이 되었던 나라가 바로 일본과 러시아 인데, 이후 일본과 러시아 사이에선 러.일전쟁이 발발하게 됩니다.


전쟁이 발발하자 일본군은 대한제국을 전쟁에 끌어 들이기 위해 압력을 강요해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를 강제로 체결하게 합니다.

일본은 이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에 따라 대한제국의 외교와 재정에 직접적인 관여를 하면서 일본인 고문을 두게 하였습니다.

러.일 전쟁은 결국 일본의 승리고 끝이나고, 포츠머스조약에 의해 러시아는 대한제국에 대한 일본의 우월권을 승인하게 됩니다.

또한 일본은 한.일협약을 체결하면서 통감부를 설치하고, 장관인 통감이 한국의 외교를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초대 통감이 비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이등박문)]' ( 1841~1909 : 야무구치현 출생. 요시다 쇼인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존황양이(尊皇攘夷)운동에서 큰 활약을 한다. 메이지 정부에서 초대 내각총리 대신을 지냈으며, 이후 4차례에 걸쳐 내각을 조직(1885~1888, 1892~1896, 1898, 1900~1901). 러.일 전쟁 이후 초대 조선통감을 지냈고, 통감 사임 후 하얼빈에서 안중근 의사에게 사살되었다. ) 였습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대한제국정부가 을사조약 체결에 주저하고 있자 군대를 동원하여 왕궁을 포위하고 회의장에 들어와, 대신 한 사람 한사람에게 가부 결정을 강요하여 강압적으로 조인시켰습니다.

이로 인해 이토 히로부미는 일제강점기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악의 인물로 인식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일본의 노골적인 폭압을 널리 알리기 위해 1907년 고종은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하여 일본의 제국주의의 실상을 폭로하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주최국이었던 네델란드의 정부와 러시아를 비롯한 각국의 대표들이 대한제국의 자주적인 외교권을 인정할 수 없다는 태도를 최하는 바람에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일본이 이 사건을 이유로 고종을 강제 퇴위 시키고, 대한제국정부가 일본의 지도를 받는다는 내용의 골자로 한 '한일신협약'을 체결한 다음 군대도 해산시켜 버립니다. 

이에 군인들은 의병운동에 투신하여 전국 각지에서 의병 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합니다.

그 중 한 사람이 바로 국가의 영웅 '안중근' ( 1879~1901 : 1895년에 천주교에 입교, 1907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의병운동에 참가 하였다. 1909년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 역에서 암살하고 뤼순에서 사형되다,,,) 은 1909년 하얼빈 역에서 그 유명한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는데 성공 합니다.

이 일로 안중근 의사는 일제에 의해 사형을 당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