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百濟) 건국 시기와 풍속. "삼국사기"의 기록 바탕
백제(百濟)가 건국한 해에 대해서는 "삼국사기"에 전한, 성제의 홍가 3년, 곧 서기전 18년이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하지만 "삼국사기"의 초기 기록 중에는 나중에 지어낸 듯한 부분이 없지 않기 때문에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고 합니다.
때문에 다른 자료를 통해 검증할 필요가 있는데, 중국측의 당시 자료와 남아 있는 유적, 유물을 검토해보면, 한강 유역에서 백제가 건국한 시기는 대략 2세기 무렵의 일이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해봅니다.
백제의 건국 및 성장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유적으로는 춘선시 중도의 적석총, 가평군 마장리의 주거지, 양평군 대심리의 취락지, 양평군 문호리의 적석총, 하남시 미사리의 주거지와 밭 유적, 서울시 송파구의 석촌동. 가락동 백제고분군, 풍납동토성, 몽촌토성 등이 대표적입니다.
백제의 주민으로는 왕실을 차지하고 귀족층의 주류를 이룬 부여, 고구려계 남하민과 마한의 구성원이던 토착민이 주류를 이루었으며, 그 밖에 낙랑, 대방군이 멸망하면서 백제에 흡수된 중국계와 교류를 통해 백제에 거주하던 일본계 백제인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지리적 조건과 중국계 백제인들의 활동 때문인지 백제는 중국 문화의 영향을 비교적 빨리 그리고 많이 받은 국가에 속합니다.
백제인들은 일찍부터 유학을 널리 배우고 익혔으며, 혼인 풍습이 중국과 같고, 부노가 돌아가시면 3년상을 치르는 등 중국의 예법에 따르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언어와 의복은 고구려와 같았으며, 말타고 활 쏘는 것을 중시하는 등의 풍습 또한 고구려와 같았다고 합니다.
백제의 여성들은 시집을 가기 전에는 머리카락을 한 갈래로 땋았지만, 시집을 가게되면 양 갈래로 땋았다고 전해지는데 이것 역시 고구려의 풍습과 같은 것일 듯 합니다.
그리고 절을 할때는 양 손을 바닥에 대어 존경을 표했으며, 투호와 저포 등의 놀이와 바둑, 장기를 즐겼다고 합니다.
투호란 멀찍이 서서 항아리 안에 화살을 던져 넣는 놀이이며, 저포는 주사위로 하는 놀이를 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