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절한 왕 문종(文宗)의 생애와 계유정난(癸酉靖難)
문종(文宗)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학문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는 세종 3년에 세자가 되었으며,
세종(世宗)을 닮아 근면성실하고 호학(好學)이었으나 병약하여 즉위한지 2년만인 39세에 종기를 앓다가 세상을 떠났다.
문종 '이향(李珦)'은 색을 멀리하고 성리학에만 전념했다. 실록에는 문종
(文宗)이 '천문, 역상, 성률, 음운 등에 통하지 않는 곳이 없었다' 고 기록되어 있다.
(역시 그 아버지의 그 아들이야!)
문종(文宗)은 병약했지만 문약(文弱)은 아니었다. 그는 직접 《진법 9편》을 지어 군사훈련을 직접 감독했고, 이러한 그의 군사지식 덕분에 다연발 로켓발사대인 화차를 발명할 수 있었고, 측우기를 발명하는 뒷받침이 되었을 것이다.
아까운 인물이 너무 일찍 죽었다.
문종(文宗)은 결혼생활이 불행했다.
세자때 맞이한 첫번째 세자빈 김씨는 문종(文宗)의 사랑을 받기 위해 방술과 투기를 행하다 폐비되었다.
(문종의 가죽신을 삶아 그 물을 마셨다지?)
두번째 세자빈 봉씨는 시녀들과 진한 동성애를 하다 폐출되었으며, 세번째가 단종(端宗)의 어머니인 현덕왕후 권씨였으나 그녀는 아들을 낳은지 3일만에 죽었다.
그 이후에는 소헌왕후와 세종(世宗)이 잇따라 병석에 눕는 바람에 세자빈을 맞아 들이지 못했고, 즉위한 뒤에도 자신의 병 때문에 중전을 맞을 수가 없었다.
문종은 재위 시절 왕비가 없었던 유일한 왕이었다.
세종 25년 세종(世宗)이 당뇨의 합병증으로 사람을 알아보지 못할 지경이 되자, 세자 이향은 정식으로 섭정을 시작했다.
아깝다! 문종(文宗)이 일찍 죽지 않았으면 수양의 왕위 찬탈도 없었을것이고 조선은 좀더 발전하지 않았을까?
계유정난(癸酉靖難)
문종(文宗)의 세번째 비인 현덕왕후는 '이홍위(李弘暐)'를 낳고 산후 휴우증으로 출산한지 3일만에 죽었다.
'홍위(弘暐)' 는 세종의 후궁이자 자신의 서조모인 혜빈 양씨의 손에서 자랐다.
세종(世宗)은 장손인 '홍위(弘暐)'를 유난히 귀여워 하여 원손을 안고 집현전에 가기도 했다.
집현전 학자들도 똘똘하고 귀여운 원손을 예뻐했으며, 특히 성삼문, 신숙주, 박팽년 등은 원손을 매우 사랑했다.
세종(世宗)은 말년에 집현전 학자들인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신숙주 등의 학자들을 불러놓고 세손의 앞날을 부탁했으며, 신하들은 눈물로 충성을 맹세했다.
(이래놓고 신숙주는 숙주나물 모양 맨치로 금방 변절하다니..)
1450년 세종(世宗)이 죽고 '이향(李珦)''이 즉위하자 열 살이었던 '홍위(弘暐)'가 세자로 책봉되었다.
병약했던 문종(文宗)은 즉위 2년 3개월만에 신하들에게 어린 세자를 부탁한다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홍위(弘暐)'는 12세의 나이로 즉위하여 단종(端宗)이 된다.
어린 나이에 즉위한 단종(端宗)에게는 수렴청정할 대비도, 대왕대비도 없어 나랏일은 의정부와 6조에서 도맡아 하게 되었다. 꼬마 단종(端宗)은 아무것도 모르는 허수아비였고 황보인과 김종서가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을 휘두르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세종(世宗)의 아들중 수양대군(首陽大君)과 안평대군(安平大君)이 대신들의 권력독점에 불만을 갖게 되었고, 각자 자신의 세를 키우기 시작했다.
수양대군(首陽大君)은 신숙주와 권람, 한명회 등을 수하로 끌어들였고 안평대군(安平大君)은 이현로 등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였다.
드디어 세종의 자식들간에 권력 쟁탈전의 서막이 오른 것이다.
1453년 10월 선수를 친 수양대군(首陽大君)은 대신들이 단종(端宗)을 없애고 안평대군(安平大君)을 왕위에 앉히려는 역모를 꾀했다는 구실로 무사들을 데리고 기습하여 김종서, 황보인을 죽였다.
이어 모든 대신들을 궁으로 모이게 한 다음 궁궐 입구에서 한명회(韓明澮)가 '살생부(殺生簿)'를 들고 호명하는 사람마다 모조리 철퇴로 때려죽였다!
이른바 '계유정난(癸酉靖難)' - 피의 숙청 이었던 것이다.
결국 계유정난(癸酉靖難)은 수양 VS 안평 그리고 김종서와 황보인 등 세 세력간의 권력 쟁탈전이었는데 미리 철저히 준비한 수양이 승리했던 것이다.
계유정난(癸酉靖難)이 일어난 뒤 수양대군(首陽大君)은 영의정이 되어 모든 권력을 장악했고, 동생 안평대군을 강화도로 귀양 보낸후 사람을 보내 죽였다.
계유정난(癸酉靖難)의 소식을 들은 함길도 도절제사 '이징옥'이 김종서의 한을 풀어 준다는 명분으로 난을 일으켰으나, 수하인 정종과 이행검의 배신으로 암살되어 봉기는 실패하고 말았다.
수양대군(首陽大君)의 폭압으로 두려움에 떨던 단종(端宗)은 울면서 옥새를 수양대군에게 넘겨주고 양위한 뒤 수강궁으로 옮겨갔고, 수양은 즉위하여 7대 세조가 되었으니 그의 나이 39세였다.
수양(首陽)이 비록 쿠데타를 일으켜 왕이 되긴 했지만, 유교 정치 이념으로 볼때 세조의 왕위 찬탈에는 아무런 명분도 정통성도 없어 도덕성에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즉 조선의 통치 시스템을 뒤흔들어 버리고 조선의 최전성기를 박살 낸 최악의 쿠데타라고 할 수 있다.
종로구의 법정동인 재동(가회동 지역의 일부)의 이름이 '계유정난' 사건에서 기인한다는 설화가 있다.
재동의 옛 이름은 '잿골'인데, 계유정난 때 많은 사람이 살해당해서 길거리에 피가 흥건하자, 백성들이 재를 뿌려서 핏자국을 지웠고 이 때문에 잿골이란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