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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한국사

한일합방과 3.1운동, 그리고 일제의 무단정치 → 문화정치로의 전개

by show쇼 2018. 9. 1.

한일합방과 3.1운동, 그리고 일제의 무단정치 → 문화정치로의 전개




1910년 일제는 대한제국을 합병하고 1945년 태평양전쟁에서 패하기 전까지 무려 36년간이나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지배했었습니다.

수도인 서울에는 통감부를 대신해 총독부를 설치하고, 1990년대에 철거된 총독부의 건물은 일제가 광화문을 옮기고 경복궁을 가로막아 세워지게 됩니다. 서울은 풍수(風水)에 근거해 세워진 도시였지만 일제는 왕궁의 한 가운데 총독부를 건설함으로써 그 풍수의 흐름을 단절시키기 위한 악의적인 목적이 있었던 것이죠,


일제는 헌병경찰을 동원해 대한제국을 지배하였는데, 헌병은 원래 군대 속의 경찰이는 의미 이지만 일반 치안 유지를 담당했던 것입니다. 이 헌병경찰에게는 매우 광범위한 임무가 주어져 있는데, 그 중에는 폭도 토벌과 노동자 단속과 함께 일본어 보급이나 우량 측량까지 포함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일제는 조선의 독립운동을 철저하게 탄압하였으며 각종 사건을 날조하면서 그 지도자를 감옥에 가두고, 또한 민족 교육을 하지 못하도록 강력한 단속을 감행합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유럽이 전쟁터가 되면서 생산이 저하되자 일제는 이를 빌미로 큰 호경기를 누리게 됩니다.

이에 따라 조선은 값싼 원료와 노동력의 공급원이 되어 엄청난 고통에 시달리게 됩니다.





3.1운동의 전개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조선인들은 세계대전 말기에 미국의 월슨 대통령이 발표한 14개조 가운데 언급된 민족자결이 조선에도 적용된다는 기대를 가지게 됩니다. 고종의 장례식 이틀 전인 1919년 3월 1일, 독립운동 지도자 31인은 종교 단체 지도자들과 함께 '독립선언문'을 발표하고 서울 파고다공원(현재 탑골공원)에서부터 대규모의 시위 행진을 벌이게 됩니다.

이들은 곧바로 체포 되었지만 만세 운동은 전국적으로 물밀듯이 확산되어 갑니다.

이것이 바로 3.1운동 입니다.

'독립선언문'을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가 만세 운동을 벌이다 체포되어 고문을 받다 죽은 15살의 앳된 여학생 유관순 열사는 이 운동의 상징적인 존재로 한국의 잔다르크라 불리고 있습니다.

파리 강화회의에서 조선의 독립이 인정될 경우에 대비해 중국 상하이에 망명정권인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이 되고,,,

하지만 3.1운동은 두 달 만에 일제의 강력한 탄압에 의해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일제의 무단정치에서 문화정치로,,


일본은 3.1운동을 계기로 기존의 강압적인 무단정치를 바꿔 '문화정치'라 불리는 정책을 전개하기 시작합니다.

한글로 된 신문과 잡지의 발간과 노동조합 및 농민조합의 결성이 인정이 되었지만 이런 일련의 정책은 조선인의 불만을 돌려 독립운동을 억제하기 위해 실시한 얄팍한 수에 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본격화 되면서 일본은 조선인들과 물자를 일본의 전쟁 수행을 위해 착취합니다.

이것을 위해 일본은 조선인을 일본 천왕에 충성하는 신민으로 개조하고자 하는 황국신민화정책을 추진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조선 각지에 신사(神社)를 세워 신도신앙을 강요하였으며, '황국신민서사'를 만들어 일본어로 제창하게도 하였습니다.

또한 일본식 이름으로 바꿀 것을 명령한 창씨개명을 실시하였습니다.


전쟁이 확산되자 일본은 조선인을 강제로 전쟁에 동원하기 위해 지원병제도와 징병제도를 실시하여 징용과 징발을 통해 조선인을 전쟁터나 일본의 군사 시설에 보냈으며, 젋은 여성을 종군위안부로 보냈습니다.

일제는 이를 합법화 하기 위해 계속해서 법률을 제정하였으며 조선인의 일본어 사용을 의무화 하기까지 하는 등의 최악의 만행을 감행하였습니다.